원주문화재단페이스북인스타그램검색

vol.2 테마:힐링

그래도 문화예술 언저리에 있고 싶은 청년들을 위하여

 

들어가며

의뢰받은 원고의 주제는 ‘청년 문화’이다. 청년도 규정하기 어렵고 문화도 규정하기 어려운데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나. 이 글은 예술가에 대한 글은 아니다. 거창한 예술 담론도 절대 아니다. 오히려 예술을 좋아하지만 맘껏 투신할 용기 혹은 재능은 조금 부족했지만 여전히 예술을 좋아하는 그 언저리에 있고 싶은 사람을 위한 글이다.

 

학창 시절 그런 아이들이 한명씩 꼭 있다. 남들이 대중가요 들을 때 인디 음악 듣고 이것이 진짜 음악이다.. 라고 하는 학생. 남들 다 하는 유행에 따라가려니 똑같아 보이는 건 뭔가 어색하고 불편한 학생.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과감할 용기는 모자라서 이도 저도 아닌 위치에서 어정쩡하게 자란 학생. 나는 그런 학생이었다. 그런 나의 어정쩡함이 빚어내 어정쩡함을 강화시킨 결정적 사건이 일어났다.

 

고등학교 시절 부족한 실력이지만 나는 틈틈이 베이스 기타 익혀 축제 무대에 서서 밴드 공연을 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결국 나는 무대에 서지 못했다. 밴드 회장은 나의 실력 부족을 이유로 공연 전날 다른 베이시스트를 구했노라고 이야기했다. 더 당당하지 못했던 나는 “어, 그래 알았어.”하고 얌전히 물러갔다.

 

(사진설명 : 그 때 공연하기로 하고 연습한 곡은 델리스파이스의 ‘차우차우’였다. 다른 베이시스트를 구했다는 그 때 목소리는 아무리 애를 쓰고 막아보려 하는데도 들린다. / 사진 출처 = 멜론 매거진)

 

회장 입장에서는 당장 공연을 서야 하는데 실력의 부족으로 합주를 따라가지 못하는 나를 세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부족한 실력은 연습으로 메꾸어야 했다. 하지만 연습량이 턱없이 부족했다. 연습실에 갔을 때 손에 해골반지 잔뜩 낀 대학생 형들과 자욱한 담배연기가 무서워 더 연습실에 갈 자신이 없었고, 집에서는 한창 공부할 시기에 기타 붙잡고 있는 나를 타박하는 부모님의 시선을 이겨낼 자신이 없었다. 안이든 밖이든 더 예술에 과감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십대 시절 맘껏 소화되지 못한 나의 욕구는 대학 졸업을 앞두고 취업을 준비하던 중에 갑자기 뜬금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취업난이 한창일 때 학부 시절 배운 것은 있어 대기업 자소서에 대기업을 비판하고 유통업 인턴을 준비하면서도 대형 마켓의 골목 시장 침투를 성찰해야 한다고 대자보에나 어울릴 만한 글을 자기소개서에 써대곤 했다. 당연히 지원하는 족족 시원하게 떨어졌다. 취업에 대한 절박함이 덜했는 것인지 철이 덜 든 것인지 지금도 알 수 없으나 나는 결국 문화예술과 관련된 무언가를 해보겠노라 하고 당시 야외 공연장을 오픈하는 아는 형님의 요청을 받고 개관 멤버로 합류했다.

 

개관 과정은 고달팠다. 매일 이어지는 야근과 하루 종일 무언가 신나게 일을 하기 보다는 그냥 대표님이 밖에서 뭔가 건덕지를 갖고 오기 전까지 무한대기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 대표님은 개관 준비를 위해 내가 더 자발적으로 움직이기를 원했겠지만 필드에 오래 있기 보다 그냥 대기업 취업하는 게 만만해 보여 구별짓기 하듯 선택한 일에 큰 애착과 열정이 있기 만무했다. 대표는 종종 나의 피동성에 아쉬움을 표했고 나 또한 당연한 것이 되어 버린 임금체불과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불만을 직간접적으로 표출하기 시작했다. 현장에서 화끈하게 일을 하기에 너무 실체가 없는 일에 투입이 되었다 생각했다. 물론 이런 악순환의 원인의 2/3 정도는 어떤 흐름을 타고 일을 해야 하는지 보는 눈도 잡을 손재주도 없던 나의 미숙함 때문이었다.

 

(사진설명 : 현재 이 공연장은 각종 기획 공연, 토크 콘서트, 영화 상영 등도 이어지는 매력적인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사진출처=아트라운지 멋진하늘 블로그)

 

불안한 날이 이어졌다. 언제 ‘제대로 된’ 직장을 잡을 거냐는 부모님의 채근은 이어졌고, 청년들의 단골 대사 ‘내가 알아서 한다고’를 주고받는 날이 이어졌다. 그러다 큰 수술을 받게 되었다. 수술을 받고 한 달간 절대 안정을 취하는 긴 요양을 하게 되었다. 부모님께서 돌봐주실 형편이 되지 않아 시골에 있는 큰아버지댁에서 지내게 되었다. 몸이 회복되는 동안 아침 저녁으로 새소리를 들으며 나날을 보냈다. 몸이 조금 회복되고 걸어다닐 수 있게 될 무렵 매일 논두렁을 오고가며 나는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가 고민을 했다. SNS에서 깨어있는 지식인은 ‘무엇을’ 하며 살기보다는(직장) ‘어떻게’ 살까(가치관)을 정립하라 했지만 내 귀에는 공허하게 들렸다. 가치를 좇아 살겠다 했으나 결국 대세를 따르고 싶지 않은 안티테제로 인한 삶의 선택이었고, 실력도 없었으니 지속력은 짧았다. 지갑도 얇아졌다.

 

다시 취업을 알아보기 위해 구직 사이트를 기웃거렸다. 기업 공채에 부지런히 원서를 넣고 취업 스터디를 다녔다. 서류를 거쳐 인적성을 통과하기도 하고 더러는 최종면접까지 본 곳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마지막엔 계속 낙방을 했다. 낙심이 되었다. 수술을 하며 큰 돈이 들었고 사람이 살다보면 이렇게 큰 돈이 들어갈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빨리 ‘안정적인 곳에서’ 돈을 모아 결혼도 하고 나의 바운더리를 갖추고 나의 삶을 일궈나가고 싶었다.

 

어느 날 구직 사이트를 기웃거리다 갑자기 눈에 확 들어온 곳이 있었다. 내개 애매하게 발 담그는 척만했던 그놈의 문화예술과 관련된 공공기관이었다. 뭔가에 홀린 듯 원서를 접수하고 자기 소개서를 써 내려갔다. 나는 최종 면접에 합격하고 현재 그 기관에서 7년째 일하고 있다.

 

문화재단에 들어오고 지난 7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직원들의 근태관리와 이사회 운영 업무를 거쳐 창작지원사업, 청년 예술인 지원사업을 하다 어느새 기업 제휴한 문화 사업을 3년 째 맡고 있다. 문화예술 기관에 종사하다 보니 예술가를 꿈꾸다 좌절한, 아니면 자기 영역에서 삶을 예술로 가꾸고픈 사람들의 사연을 자주 듣게 된다. 더 과감하지 못했거나 본인의 재능의 한계를 맛보았다던가 혹은 재능을 더 갈고 닦기 위한 뒷받침이 더 이상 허락되지 않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사진설명 : 아이디어 도출을 위한 치열한 회의의 흔적)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 언저리에 있고 싶어 하는 이 청년들은 무엇을 바라고 추구하고 있을까. 나처럼 더 과감하지 못했던 과거를 아쉬워 하며 그래도 이 언저리에 있음을 만족하며 살고 있을까. 물론 정답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이 예술 언저리에 있어 우리가 더 고민하고 살아있음을 느끼고 약간은 다른 감각으로 세상을 통찰하며 살고 있노라고.

 

문화재단에서 일하면서 내게 주어진 정체성은 예술가도, 행정가도 아닌 그 사이에 있는 매개자의 정체성이다. 어느 영역에 강한 확신으로 자신을 무장하는 것보다 흔들리며 갈등하더라도 그것이 삶의 본질임을 인정하며 끝없이 진자운동을 하는 것이다. 물론 고등학생 때 서보지 못한 무대는 나의 자리가 아니었다. 무대에 섰어도 뻣뻣하게 있다 실수만 난무하다 부끄럽게 내려왔을 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 그 아쉬움이 내게 없냐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내게는 보인다. 그 무대가 존재하기 위해서 보이지 않게 동분서주 했을 수많은 사람들 말이다. 어쩌면 이제 내가 갖추게 된 능력은 그런 사람들을 돌아보고 ‘판’이 돌아가는 구조를 살필 수 있는 ‘시야’가 아닐까. 물론 예술 현장에서는 관리와 행정의 언어로 다가오는 우리를 보며 탁상행정이라 비난을 하기도 하지만 이 책상과 컴퓨터가 나에겐 현장이기도 하다며 수줍은 반론을 (혼자) 제기해 보기도 한다. 결국 일이 결정되고 실행이 되는 것은 문서를 통해서고 하나의 문서가 나오기 위해서는 예술 현장에 대한 존중과 다양한 당사자들을 씨줄과 날줄로 잇는 소통이기 때문이다. 내 손을 거쳐 나오는 한 장의 문서와 자료들을 보며 오늘도 안도한다. 흔들리는 와중에 그래도 잘 살아남고 있다고.

 

(사진설명 : 외부 요출 및 제출자료 작성 폴더 캡쳐)

 

덧. 최근 문화예술 기관에 취업하고 싶어하는 한 학생의 고민에 답해야 할 상황이 있었다. 이 글이 고민에 대한 작은 답이 되기를 바라며 글을 마무리 한다.

 

글·사진 : 서울문화재단 메세나팀 대리 이승주

목록보기